공룡과 관련해서

어릴 적, 나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처음 심어준 존재다. 잠들기 전, 엄마는 공룡에 관한 책을 읽어주곤 했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결국 운석이 충돌해 공룡들이 멸종했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린 내가 공룡을 좋아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공룡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엄마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럼 엄마도 죽어?” 하고 울었고, 엄마는 나를 안아주며 “모두 언젠가는 죽지만, 오랫동안 곁에 있을게.” 하고 달래주던 기억이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주인공 라일리의 어린 시절 상상 친구였던 빙봉이 라일리가 청소년이 된 후에도 그녀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라일리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처럼, 내 안에도 생물학적이거나 고고학적인 존재로서의 공룡이 아닌 초록빛 피부의 파충류스러운 무언가가 오래 잠재되어있던 의식세계 어디선가에서 엄마와 나눈 첫 죽음에 관련된 대화, 추억을 보관해주고 있었다.

언젠가 아크: 서바이벌 이볼브드(ARK: Survival Evolved)라는 게임을 진지하게 한 적이 있다. 원시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배경 속에서, 플레이어는 원시인으로 시작해 공룡을 사냥하고 길들이며 기술을 터득해나가며 생존해 나간다.
내가 처음으로 길들인 공룡은 어두운 초록빛을 띠는 프테라노돈이었다. 어디를 가든 그 프테라노돈을 타고 이동하면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거운 짐을 옮길 때도,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늘 나를 돕던 친구였다. 때때로 프테라노돈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에 다녀와야 할 때면, 나는 녀석을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긴 시간 프테라노돈을 비롯한 다양한 공룡들과 어울리며 수렵채집을 하며 나만의 작은 생태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로그아웃한 사이 한 중국인 고수 유저가 내 거점을 습격했다. 내가 쌓아온 것들은 잔해만 남았고, 모든 공룡은 살해당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게임 속 세상을 떠돌다 나의 프테라노돈과 똑같은 공룡을 마주쳤다. 알고리즘에 의해 단순히 리스폰된 공룡이었다. 나와의 상호작용도, 기억도 리셋된 채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공룡. 하지만 허무함보다는 ‘이번 생은 행복하길...’ 하는 감정이 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 없다고 생각했던 매끈한 초록빛 피부의 존재가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어떤 계기로 인해 다시 의식 위로 올라오고,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먼 미래의 나는 이 사랑을 초월적인 방식으로 다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사랑을 매개하는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날 것이다. 아마 지금은 알아볼 수 없지만, 아주 가까운 곳 어딘가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연한 계기로 마주하게 될 친구들일 것이다.
외계인과 관련해서

어렸을 때부터 외계인과 UFO,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들에 끌렸다. 그것들은 허구의 영역이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때로는 공포스럽게, 때로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귀신을 봤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대상이 정말 ‘죽은 자’의 형상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도 외계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둘러싼 논의는 과학과 철학, 그리고 대중문화에서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우리는 망원경을 통해 외계 행성을 찾고, 신호를 분석하며 그들이 존재하는지 탐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들을 보지 못했다. 혹은, 보았으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는 두려움과 궁금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만약 그들이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가진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반대로, 그들이 단순한 미생물 수준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외계 생명체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과연 우리가 보는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얼마나 인식할 수 있는가?

칼 세이건은 외계 문명이 평화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고,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스티븐 호킹은 우리가 섣불리 외계 문명을 찾고 교류하려고 하면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단순한 ‘외계 생명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우리 바깥의 세계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가져왔다.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들, 처음 바다를 건넜던 사람들, 그리고 우주로 나아가는 인류 모두가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며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초자연적인 것들,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할 때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경험들은 단순한 환상이나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이 감지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존재’일 수도 있다.
공동묘지와 관련해서

페루의 공동묘지 Parque del Recuerdo Lurín을 방문하며...

2023년 3월, 처음으로 페루를 방문해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중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다양한 꽃들로 가득한 평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이할 정도로 꽃이 가득한 풍경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행과 함께 이동 중이어서 멈출 수 없었다. 꽃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해당 지역이 리마의 사막 지역으로 꽃이 자라기에 척박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2023년 7월, 운 좋게 다시 한 번 페루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그곳을 꼭 가겠다고 마음먹고, 따로 시간을 내어 마침내 도착했다. 묘지 내부로 들어서자 끝없이 펼쳐진 넓고 푸른 잔디밭이 눈에 들어왔다. 각 묘비 앞에는 정해진 형태로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이는 마치 자연과 죽음까지도 통제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는 듯했다. 생명이 자라나는 자연의 공간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엄격한 질서와 규율을 따르는 듯 보였다.

그런데 반전은, 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꽃이었다. 자연과는 상반되는 인공적이고 기하학적인 풍경이 주는 아이러니함은 작품의 주제로 삼기에 충분했다. 이 경험을 하면서 나는 인간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공간적으로 구성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인간은 서로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자연을 규격화하고, 기하학적으로 조직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묘지 중앙에는 예수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수상은 신성한 존재를 기리면서도, 형태적으로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중간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곳에 심어진 야자나무들은 불규칙한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자연의 본래적 불규칙성을 수학적 질서로 변환하려는 인간의 시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사실,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도 수학이 아니던가?

공동묘지는 본질적으로 죽음을 위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기억하고 유지하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서 삶의 흔적이 남는다.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구조와 엄격한 배열 속에서도 자연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자체로 영속성을 상징한다. 풀은 자라고, 꽃은 시들며, 바람은 불어와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인간이 만든 공간 속에서 자연은 끊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영속성과 유한성, 질서와 불규칙성 사이의 긴장을 형성한다.
꽃과 관련해서

분명 꽃에 대한 고찰은 식물학자들, 작가들, 예술가들에 의해서 이미 많이 분석되고, ‘문학화’, ‘시적화’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에 대한 나만의 생각들을 써보려 한다. 아마, 꽃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그래왔듯이, 이미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수세기 전부터 교과서화 되었을 법한 고리타분한 시대에 뒤쳐진 당연한 이야기일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느꼈다. 자전거를 타고 수 키로를 달리다가, 길가에 가지런히 심어진 꽃들을 보았다, 작년에도 보았던 그 곳에 있었다. 30도 이상을 육박하는 덥고 습기찬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강이 주는 더운 냄새와 그 주변 녹음이 머금고 있던 시원한 냉기를 맞으며 스쳐 지나갔던 꽃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심어지고 관리되어 왔을 것이다. 아마 한강 자전거 도로 옆이라면, 어느 개인이 부담해서 만들어진 꽃밭이 아니라, 세금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이 꽃밭에 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은 마음 놓고 즐겨보자.

꽃들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해보자, 언제부터 우리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였고, 축하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꽃말을 붙였을까. 상상해보면, 고대에 한 사람이 구애를 위해 상대방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단으로 무엇을 사용했을까... 고민하다가 들판에 펼쳐진 꽃을 보고 ‘아! 이거다!’ 하며 한 송이 한 송이 모아 다발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꽃다발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곧 유행으로 번져, 곧이어 많은 이들이 꽃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상상만으로 만든 이야기지만, 분명 꽃다발 선물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올 만큼 그 의미는 깊다.

꽃을 심고, 자라게 하며, 수확하는 행위, 혹은 자연에서 자라난 꽃들을 찾아 모으고 그것들을 한송이씩 꺾어 다발로 만드는 행위, 이 모든 것들은 진심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진심을 표현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고된 일일까.. 하고 반문해 볼 정도다.



꽃봉오리를 만저 봤다. 너무나도 연약하다.
그럼에도 생기 넘친다.

오동통, 통실통실,
촉촉, 단단,
그럼에도 오독, 뚝.
프로그래밍과 관련해서

“기계적 감정”
모든 지적 생명체의 행동, 의사 결정, 그리고 심지어 희망조차도 근본적으로 생존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하는 나름 염세적인 생각을 풀어본다. 이는 생존이 단순히 육체적 연속성만이 아니라, 행복과 안녕(well-being)을 유지하려는 본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과 맞닿아 있다.

이를 더 확장해 보면, 이 원리는 지적 능력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보다 단순한 생명체일수록 행동이 본능에 의해 직관적으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하고, 번식하는 행위들은 생존 본능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지적 능력이 복잡해질수록 생존 본능은 보다 추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의 경우, 직업을 선택하고, 관계를 맺고, 철학적 질문을 탐구하는 등의 행동이 직접적인 생존 행위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존과 행복을 유지하려는 본능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사고회로가 단순한 동물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포식자는 먹이를 사냥해야 살 수 있고, 초식동물은 포식자로부터 도망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들은 복잡한 윤리적 고민이나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생존이라는 목표에 따라 단순하고 명확한 행동을 보일 뿐이다.

반면, 인간의 생존 본능은 감정, 사회적 구조, 지적 추구와 결합되면서 더욱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된다.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하고, 예술적 충족을 원하며,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 역시 결국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고통을 줄이며,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적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행복이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강화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설계된 메커니즘이라면,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는 결국 생존 본능의 연장선에 있다. 심지어 자기희생적인 행동조차도 이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는 행위는 유전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특정 신념이나 목적에 바치면서 정신적 만족을 얻는다. 이는 육체적 생존뿐만 아니라 심리적 생존과도 연결된다.

결국, 사고회로가 단순할수록 생존 본능의 원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사고를 할수록 생존 전략은 다양해지고, 표면적으로는 생존과 무관해 보이는 행동들도 사실상 같은 목표를 향해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빛과 관련해서

“빛의 단면”

버드아이뷰로 내려다본 도시의 야경을 본 적이 있는가?
도시는 거대한 빛의 집합체다. 수많은 건물과 도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신호등, 그리고 끝없이 반짝이는 LED 광고판까지... 차를 타고 퇴근하는 사람들, 늦은 밤까지 사무실 불을 밝히는 이들,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누군가. 그들에게는 각자의 사연과 맥락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부모이자 자식이고, 연인이자 친구일 것이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서울의 불빛들은 그러한 개별적 서사를 모두 덮어버린다. 수많은 움직임과 에너지가 응축된 도시조차도, 멀리서 보면 그저 하나의 평면적인 빛의 장으로 보일 뿐이다.

그날은 안개가 낀 날이었다. 나는 우연히 건물 위의 LED 광고판을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볼 때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맥이 존재한다. 그것이 글자든, 이미지든, 영상이든 우리는 이를 ‘정보’로 인식한다. 그러나 옆에서 보니 그 정보는 사라지고, 오직 흩어진 빛의 입자들만 남아 있었다. 미세한 물방울들이 빛을 산란시키면서, 본래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흐릿한 색의 조각들이 떠다니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는 이 현상을 소통과 정보 전달의 과정에 대입해 보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정보’는 빛이 질서를 갖춘 상태에서 명확한 언어로 전달될 때 성립한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각도에서 조우하면, 즉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거나 예상치 못한 경로를 거칠 때, 정보는 조각나고 분해된 채 떠다닌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해독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적인 패턴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 흐릿한 빛의 조각들이 전하는 감각은 의외로 평온하고, 단조로우며,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든 정보가 반드시 질서를 갖춰야 할까.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이 그 자체로 하나의 평면적인 풍경이 되는 것처럼, 분해된 빛의 입자들도 나름의 형태와 감각을 만들어낸다. 언어로 해독되지 않는 정보도 그 자체로 존재의 한 형태이며, 때로는 그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조될 수도 있다.

결국,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화면도, 원래 그 정보를 구성하던 빛이 질서를 잃을 때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



“인공조명”

밤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낮에는 불필요한 정보들이 무차별적으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밀려든다. 특히 색이 그렇다. 내가 골드스미스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이론수업 튜터였던 데이비드 바첼러 교수가 저술한 크로모포비아(Chromophobia)가 떠오른다. 그는 색이 동양적, 여성적, 유아적, 저속하거나 병적인 이물질로 여겨지면서 색 자체에 대한 혐오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오랜 시간 무채색이 가득한 런던에서 10년 남짓한 시간을 지내며, 문명 사대주의에 알게모르게 빠져있던 나는 팬데믹과 비자 만료로 인해 다양한 색이 난무하는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성이라는 나의 정체성까지 더해지면서, 그의 이론이 나를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와 닿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여전히 밤이 좋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밤이 되면 시각적 환경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밤은 일종의 샌드박스 같은 공간이 된다.

건축가 유현준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셜록현준에서 이를 건축적으로 해석한 바 있다.

낮에는 라이팅을 우리가 컨트롤을 못해요. 햇빛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그 얘기는 뭐냐면,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나, 저쪽에 단상에 서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받는 거예요.

그림자를 똑같이 받아, 평등한 사회인 거예요.

그래서 서양 미술에서 볼 때 되게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가 그림에 그림자가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예요.

르네상스 때 처음으로 그림자를 그리거든요? 그 얘긴 뭐냐하면은, 인간의 평등함, 인간의 유한함. 이런 것들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전에는 중세시대 때 그림을 그릴 때는 항상 하나님 중심이고 이렇게 되면 그림자가 없어요. 그래서 평평한 그림이었다면, 그림자를 넣음으로 인해서 이 사람의 존재를 유한하게 하는데, 문제는 낮에는 독재자와 거기에 모인 사람이 똑같은 햇빛을 받는단 말이에요. 근데 밤이 되면 조명을 바꿀 수가 있잖아요 인공조명으로. 저 사람한테만 서치라이트를 딱 때릴 수가 있고, 서치라이트로 기둥을 100개씩 몇백 미터짜리 높이의 건물을 만들 수 있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독재자를 부각시키려면 밤에 해야 하는 거예요.


경제적으로 밤은 효율적이다. 낮에는 정보전달의 형태가 3차원 형상까지 고려되어야 하지만, 밤에는 전달할 정보의 형태를 3차원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다. 2차원으로도 충분하고, 더 나아가 1차원만으로도 가능하다.
패턴과 관련해서

“아포페니아”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을 보며 한 장면이 내 사고방식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체스를 배우게 된 베스 하먼은 체스판 위에서만큼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체스판은 단 64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예요. 그 안에서는 안전하다고 느껴져요. 내가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예측도 가능하고요. 설령 다친다고 해도, 그건 제 탓이죠.
베스 하먼에게 체스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현실은 무질서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체스판 위에서는 명확한 규칙이 작동한다. 체스는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질서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시리즈에서는 베스 하먼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아포페니아(Apophenia)로 설명한다.
아포페니아란 무관한 정보 속에서 의미와 패턴을 찾아내는 심리적 경향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본능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아포페니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의미 없는 현상에서도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고,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연결성을 찾아낸다. 이는 창의성과 정신적 불안정성이 교차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원리를 발견한 것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구름과 물결에서 형상을 찾아내 그림으로 남긴 것도, 칼 융이 무의식 속의 패턴을 탐구하며 ‘집단 무의식’ 개념을 발전시킨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질서를 발견하려는 강한 집착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남긴 흔적에서 큰 영감을 받으며, 그들의 시선이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이 영화 매트릭스처럼, 현실의 무질서 속에서도 어떠한 패턴과 숨겨진 규칙을 갖고 있다고 믿고 그것을 찾아내려 한다. 과학, 수학, 신, 종교, 심지어 유사과학과 신비주의적인 개념까지 동원해 나만의 체계를 구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찾은 규칙이 반드시 기존의 학문적 패러다임 안에서 검증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본능적인 시도일지도 모른다. 베스 하먼이 체스판 위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 정립한 세계관 속에서 질서를 찾고 안정감을 느낀다.

내가 세계관을 구축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죽음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존재를 연속시키기 위함이다. 보통 죽음이란 자신의 이전과 이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내가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한다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다.
즉, 죽음을 하나의 절대적인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과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는 이 체계를 통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구축한 세계관 속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 현실의 법칙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만든 체계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진다. 나는 세상의 패턴을 찾고,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이것이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SF 영화에서도 이런 상상을 하고, 일론 머스크는 화성에 가고자 하는 욕망 하나로 엄청난 기술 발전에 투자하지 않았던가?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는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귀신과 관련해서

박명이 깔린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산 능선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하늘과 칠흑같이 어두운 산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평면적으로 보였다. 마침 국악에서부터 시작된 플레이리스트에서 알고리즘에 의해 희한한 국악기의 현소리가 길게 늘어지는 실험적 음악이 나오던 참이었다. 기묘한 긴장감을 더했다. 저 칠흙같이 어두운 산에서 귀신들이 빽빽하게 모여 나를 몰래 바라보고있다면 어떡하지?

어둠이 선사한 산의 평면적 이미지 덕에 산을 온전히 나 혼자 마주하게 되었다. 혼자라는 생각 덕에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공포라는 감정 덕에 이세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덕에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아기가 자신의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누군가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 혼자 있을 때뿐이다.
— 도널드 W. 위니콧
우주와 관련해서

우주는 관계이고
관계는 사랑이야.

— 양승모



“Ο”, “∞”, “Ω”, “”

우주는 팽창하고, 유한한 리소스를 갖고 있다. 엔트로피는 지구, 태양계, 은하,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범위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며, 철저한 물리 법칙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우주를 하나의 고립계(isolated system)로 본다면, 언젠가는 에너지의 이동이 끝나고, 마치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팽창을 멈춘 우주는 극한의 엔트로피 상태에 도달한 뒤 조용히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모든 것이 멈추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시간조차 정지한 거대한 암흑.

우주의 팽창이 끝나고 인플레이션이 멈춘 순간, 열평형이 찾아오면 무한하던 공간은 의미를 잃고, 결국 0이 된다. 무한대가 순식간에 점이 되는 순간.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주의 운명에 대한 가설들은 갈린다. 다시 빅뱅이 시작되어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는 설, 아니면 우주가 수축해 되돌아간다는 설. 나는 후자에 가까운 생각을 한다. 우주가 끝에 다다르면, 그것은 곧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시간 역시 역행한다. 거꾸로 흐르는 우주 속 존재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반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애초에 그곳에서는 그 방향이 정방향일 것이다. 결국 빅뱅에 도달하고, 다시 같은 우주를 반복하며 무한히 순환하는 세계. 철학자들이 말한 영원회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물리적 차원에서 그대로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탄생과 죽음의 구분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죽음이 거꾸로 우주에서는 탄생이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탄생이 거꾸로 우주에서는 소멸이라면, 결국 둘은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예수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수렴하는 순간이 있다. 0의 순간. 나와 타자의 경계도, 모든 대립도 사라지는 지점. '너'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듯이, 개별적인 존재의 의미는 그 지점에서 무너진다.

죽음은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며, 거꾸로 우주에서는 그 순간이 곧 탄생이 된다. 거꾸로 세계에서의 죽음이 다시 빅뱅을 거쳐 이 우주를 만들고, 그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열평형이 올 때까지의 시간, 0에서 다시 거꾸로 우주에서 내가 죽는 시점까지의 엄청나게 긴 시간을 nothing이라는 상태로 스킵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단순한 공백이다, 어쩌면 공백이라고 칭할 수 조차 없을만큼 우주가 다시 나를 필요로 할 때까지의 찰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순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이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해탈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 nothing 상태로 넘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해탈이란 이 무한히 수축하고 팽창을 반복하는 우주 속에서, 그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것이다. 니체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인간이 충분한 광기를 통해 그것을 깨부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을 가진 자가 초인(Übermensch)이고, 불교에서는 이를 해탈이라 부른다. 결국, 이 무한한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nothing 상태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을 바꾸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나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3차원의 이해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라고. 단순히 4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해탈이 가능하다고. 3차원에 갇혀 있는 한, 우주는 무한히 반복되는 수레바퀴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마치 “플랫랜더”(Flatlander)처럼, 2차원 세계에 사는 플랫랜더들은 3차원의 물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3차원에서 봤을 때의 완전한 구가, 플랫랜더들에게는 처음에는 작은 점으로 나타나 점점 커지는 원이 어느순간 다시 작아지며 사라지는 것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3차원의 시점에서 우주의 거대한 순환을 바라볼 때는 그것이 단순한 반복처럼 보일 뿐이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도, 이 0의 순간을 현재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해탈이란 단순히 반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 패턴을 초월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이 순간에도 0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단순한 연속성에서 벗어나 모든 시간과 존재를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우주의 순환을 경험하면서도 그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초월이 아닐까.

결국, 우주의 순환 속에서 다시 0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만물이 하나가 된다.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흘러갈 뿐이다.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을 진리라 믿고 흉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가짜 깨달음을 깨달음이라 알고 싶지는 않다. 속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직 어렵다. 당장 중요한 것들이 많고,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과 관계들은 여전히 삶에서 크다. 인과관계, 작용 반작용의 관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생은 그냥 플랫랜더로 살아볼까 한다.
천국과 관련해서

“윤동주의 자화상을 읽고, ‘시인의 우물’”

사람은 고여 있는 웅덩이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성장은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것들의 간섭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연결을 끊고 혼자가 되는 순간이 온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나를 형성했던 모든 관계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일지라도, 더 나아가 내 자신일지라도. 그래야만 제대로 자랄 수 있다.

봄이 지나고 가을이 오듯, 조력자들은 제때가 되면 내 곁에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다. 낙엽처럼. 독고다이. 결국,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거라더라.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나는 마치 낙원에서 쫓겨나 자연에 버려진 아담과 이브 같다. 나뭇잎을 주워 모아 서둘러 가면을 만든다. 진짜 내 모습은 도저히 그대로 내놓을 수 없을 만큼 못나 보인다. 쑥스럽게도.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부른다. 나를 감추기 위해 만든 가면들은 점점 커지고, 이제는 내 본모습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에 정작 내가 나 자신이기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주객이 전도되고, 이질감이 특이점처럼 찾아오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편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럴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런데 이게 정말 행복한 삶일까. 이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어디를 둘러봐도 긍정적인 건 하나도 없다. 가면을 벗어야 한다. 이 춥고 축축하고 궁상맞은 길을 끝까지 걸어야만 빛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그 빛이 나를 완전히 감쌀 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둠 속에서 몰래 나를 응원하던 조력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견뎌낸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겠지.
ⓒ 2025 Geunbae Yang